전체 글 (1124) 썸네일형 리스트형 끼어들기 범칙금 고지서(박도진) 끼어들기 범칙금 고지서(박도진)화순 전남대병원 앞 요양병원으로 가는 길, 아침 출근길의 도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자동차 강이었다. 조금이라도 덜 막힌 차선을 따라 천천히 달렸다. 제2순환도로 지원교차로에 이르러 진출 차선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끝내 틈은 열리지 않았다. 그대로 지나치면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 길. 새치기를 하려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앞을 가로막으려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갈 곳으로 가려 했을 뿐인데, 인정사정없는 단속 카메라는 사람의 사정 대신 한순간의 장면만 기억했다. 사십 년이 넘는 운전 인생, 처음 받아 본 끼어들기 범칙금 고지서. 운전자를 인정하면 삼만 원, 확인하지 않으면 사만 원. 종이 한 장에는 금액만 적혀 있을 뿐, 그날 아침 긴 정체도, 초조했던 마음도, 아픈 아내를 만나.. 병실에서 흔들리는 것들(박도진) 병실에서 흔들리는 것들(박도진)암과의 싸움은 짧은 전력질주가 아니라 끝이 보이지 않는 마라톤이다. 병실에 모인 이들은 절망의 벼랑 끝에 서서도 실낱같은 희망 한 가닥 내릴 때면 두 손 모아 꼭 쥐어본다. 하지만 마음은 시소처럼 서글프게 흔들린다. 한쪽에는 병으로 약해져 가는 몸과 마음, 다른 한쪽에는 버거운 치료비와 내일의 불안. 항암이 거듭될수록 약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무너지지 않는 체력이다. 환자의 체력, 보호자의 체력, 가정을 지탱할 경제력. 이 세 기둥이 서로의 어깨를 고쳐 쥘 때 아득한 치료의 길도 다시 한 걸음 이어진다. 그 길목에서 마주한 화순군립요양병원. 문턱을 넘어서기조차 아슬아슬했지만 그 문이 열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에게는 더없는 은혜였고, 긴 마라톤의 끝을 향해 다시 발을 내딛.. 항암 연구치료(박도진) 항암 연구치료(박도진)췌장암 3기라는 아득한 이름 앞에 선 날, 대학병원에서는 의사보다 먼저 연구원들이 우리를 맞았다. 채혈 동의서 위에 떨리는 서명을 바라고, 내일의 희망을 다투는 임상시험에 함께해 달라 청했다. 고개를 끄덕이기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가의 연구 대상이 된다는 생각에 차마 가슴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문득 생각한다. 오늘 아내의 숨을 붙들고 있는 저 항암제 또한 누군가의 용기와 기다림을 지나 우리에게 건너왔을 것임을. 언젠가 아내는 조용히 말했었다. "내가 떠나면 몸이라도 기증하겠노라"고. 하지만 나는 끝내 그 말을 막아섰다. 사랑을 지키려는 마음은 숭고한 뜻보다 먼저 그 단단한 손을 붙잡게 하는 법이니까. 생명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확신보다 망설임이 먼저 차.. 2차 항암의 시작(박도진) 2차 항암의 시작(박도진)첫 번째 항암은 거센 폭풍이었다. 구토가 밀려오고 입맛은 먼 길을 떠났으며 몸무게는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다. 변비는 몸을 붙들고, 백혈구는 힘없이 무너져 아내는 마침내 항암을 계속해야 할 이유마저 잃어버릴 듯했다. 병원을 옮긴 뒤 주치의는 수치보다 먼저 환자의 얼굴을 읽었다. "몸이 견딜 수 있도록 갑시다." 백 퍼센트의 공격보다 팔십 퍼센트의 지속이 더 큰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방으로 말해 주었다. 감량 치료는 포기가 아니라 끝까지 걷기 위한 속도의 조절이었다. 놀랍게도 아내는 항암을 받으면서도 조금씩 식사를 이어 갔다. 한 숟가락의 밥이 한 걸음의 희망이 되고, 한 모금의 물이 내일을 향한 용기가 되었다. 암과의 싸움은 누가 더 빨리 달리느냐가 아니라 끝내 멈추지 않.. 항암치료 병원 옮기기(박도진) 항암치료 병원 옮기기(박도진)아무리 이름난 병원이라도 오가는 길이 환자에게 고통이라면 그 명성은 먼 산의 불빛일 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서울 신촌의 분주한 병원을 떠나 지방의 대학병원에 들어서니 복도는 한결 조용하고 낯익은 사투리와 익숙한 풍경이 지친 마음을 먼저 안아 준다. 의사 소견서를 두 손으로 건네며 이제 아내의 생명을 함께 맡아 주실 새 주치의 앞에 조용히 말한다. “이곳에서 아내의 치료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짧은 동의 한마디가 우리에게는 긴 어둠 끝의 한 줄기 빛이 되었다. 병실이 모두 차 있어 항암 일정은 곧 연락드리겠다는 말을 들었지만, 기다림마저도 희망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 수많은 검사와 눈물, 끝이 보이지 .. 청국장(박도진) 청국장(박도진)천하의 절경도 산해진미 진수성찬도 배 속이 꽉 막혀 있으면 그저 헛된 그림일 뿐. 사흘, 나흘 소식 없는 장을 달래며 약도 먹어 보고 관장까지 해본다. 변기 위에 앉아 온몸의 핏대를 세워도 꿈쩍 않는 침묵 앞에서 사람은 제 무력함을 배운다. 처제가 보내온 청국장 항암의 무거운 그림자도, 굳게 닫힌 장의 침묵도 구수한 냄새 앞에서 슬며시 문을 열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울렸다. “여보, 나 시원하게 보았어.” 그 한마디에 가슴을 누르던 돌덩이가 스르르 굴러내렸다. “그래, 정말 다행이야, 축하해.” 행복은 세상을 뒤집는 거창한 기적이 아니었다. 막혔던 삶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순간, 고통 끝에 찾아온 평범한 안도가 가장 눈부신 축복임을 우리는 청국장 앞에서 .. 기저귀(박도진) 기저귀(박도진)변비가 심해 몇번이고 변비약을 먹는다 그래도 안돼 스스로 항문에 좌약을 넣고 그것도 인돼 손가락으로 항문을 파헤쳐 굳은 변을 뽑아낸다 항문은 찢어지듯이 아프고 이후 걸으면 변이 스스로 말도없이 흘러내리고 팬티를 몇번이나 적시고 나서 기저귀를 찬다 환자는 자신의 몸이 더 이상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울고 있다 인간 존엄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 미안함, 수치심, 눈물조차 삼키는 침묵이 함께 찾아온다 사람의 품위는 몸이 아니라 끝내 살아내려는 마음에서 피어난다. 병상에서의 자존심(박도진) 병상에서의 자존심(박도진)항암제가 지나간 자리, 비단결 같던 머리카락은 바람처럼 떠나고 부작용으로 찾아온 변비와 관장, 속수무책으로 흘러내리는 육체의 부끄러움 앞에서도 그대의 자존심만은 무너지지 않는다. 겨울 끝에 시든 꽃도 병든 고목도 마침내 새순을 밀어 올려 푸른 생명의 이름을 다시 쓰듯, 여윈 얼굴로 병상에 누운 그대, 아름다움을 잃은 것이 아니다. 고통은 몸을 흔들 수 있어도 영혼의 품격까지 앗아가지는 못하느니. 보라, 병상에서도 그대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존귀한 불빛으로 깨어 있다. 이전 1 2 3 4 ··· 14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