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헐리는 집 (윤삼하)
강둑이건 담벼락이건
모두 무너져 내린다
자갈을 깨무는
강철의 손 앞에
모든 지붕과 창살들이
입김처럼 떨고 있다.
대들보와 서까래들이
삐죽삐죽 빠져 달아나려 한다.
맨 처음 머리채를 거두어 내고
가슴패기와 옆구리
은빛 살결을 난자(亂刺) 했다.
뼈와 살을 가르는 아픔을
큰 기둥뿌리로 버티다가
끝내 고개를 떨구며 쓰러졌다.
문득 해를 가리는 티끌바람 따라
시들지 않은 청동(靑銅)의 금빛 꽃술들이
수없이 날아올랐다.
그 위에 아무 영문을 모르는
흙과 돌조각들이
산더미같이 산더미같이
쏟아져 버렸다.
— 제3시집 『헐리는 집』 1987
2. 시인 윤삼하(尹三夏) 프로필
윤삼하(尹三夏)
시인, 교수 (1935~1995)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졸업
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졸업
195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생애 및 주요 활동]
1935년 5월 12일 일본 오사카 출생. 1956년 서울대 사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후 1975년 동 대학원 졸업했고, 1986년 외국어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익대 영문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한국 예이츠학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신춘시』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65년 전라남도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고등학교 때 박봉우 등과 함께 『상록집』이란 시집을 낸 바 있으며, 195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응시자(凝視者)」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주요 저서 및 작품 세계]
시집 『응시자』(1965), 『소리의 숲』(1976), 『헐리는 집』(1987), 『마음의 빛으로 가득 찬 세상』(1995), 『돌아오지 않는 길』(1995) 등을 간행하였고, 『에머슨 수상록』(1978) 등을 번역하기도 했다. 40여 년 가까운 시작 활동 중에 단 세 권의 시집을 묶어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윤삼하는 대표적인 과작(寡作) 시인이다. 이는 '서정주의'로 요약되는 그 자신의 시적 엄격함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대중이 이질감을 느끼고 다수의 피부에 와 닿지도 않는 예술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는 의구심" 위에서, "억울함을 당하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달래주고 어둠을 삼킬 수 있는 빛의 노래"로서의 소박한 서정시를 의도하고 있다. 그 결과 최근 시집 『헐리는 집』의 시편들은, '이름 모를 나무등걸'이나 '바람소리'에서부터 특정한 지역에 이르기까지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삶의 문제·사회적 맥락의 문제에 대한 질문 형식을 통해 감흥과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윤삼하 시인은 평생 동안 단 세 권의 시집만을 남겼을 정도로 작품 하나하나를 엄격하고 정성스럽게 빚어낸 '과작(寡作)의 시인'입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주로 자연의 섭리와 인간 삶의 고뇌를 연결하며, 소박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서정성을 띠고 있습니다. 대표작 「헐리는 집」 외에 그의 시 세계를 잘 보여주는 다른 시 두 편을 소개해 드립니다.
1. 벽(壁)
이 시는 윤삼하 시인이 195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을 때의 등단작입니다. 젊은 시절 그가 느꼈던 존재론적 한계와 고립감을 '벽'이라는 상징물을 통해 형상화했습니다.
벽(壁) (윤삼하)
언제나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소리 없는 바위의 얼굴이다.
손을 뻗쳐도 닿지 않는 거리에서
너는 완강한 침묵으로 서 있고
나는 그 발치에 엎드려
부서지는 햇살의 파편을 줍는다.
가끔은 바람이 와서 두드리고 가지만
문 없는 성벽은 대답이 없고
가슴 속 깊이 고인 갈증만이
마른 풀잎처럼 타오를 뿐이다.
아, 어느 하늘 끝에선가
이 거대한 어둠을 뚫고 올
한 줄기 빛의 소식은 없는가.
2. 이름 모를 나무등걸
이미지 속 설명에도 언급되었던 작품으로, 시인이 후기에 집중했던 '자연을 통한 사회적 맥락의 질문'이 잘 드러나는 시입니다. 버려진 나무등걸을 보며 생명의 순환과 존재의 가치를 되새깁니다.
이름 모를 나무등걸(윤삼하)
길가에 던져진 채
비바람에 살을 깎인 나무등걸 하나.
한때는 하늘을 향해
푸른 손바닥을 펼치고
새들의 노래를 받아내던 집이었으리라.
뿌리는 이미 흙을 잃었어도
몸통 속에 남은 나이테는
그가 견뎌온 시간의 깊이를
말없이 웅변하고 있다.
썩어가는 저 살점들이
다시 흙이 되고 거름이 되어
또 다른 싹을 밀어 올릴 때까지
그는 지독한 함구(緘口)로 기다리고 있다.
▶윤삼하 시의 특징
►절제된 언어: 불필요한 수사를 배제하고 핵심적인 이미지만을 사용합니다.
►서정적 엄격함: 감정에 휘둘리기보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면서도 그 안에서 따뜻한 인본주의적 시선을 유지합니다.
►빛의 갈망: 어둠이나 파괴(헐리는 집, 벽)의 상황 속에서도 늘 '빛'이나 '새로운 생명'에 대한 희망을 끈질기게 탐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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