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정호승)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정호승 시인의 시 「그는」은 고독과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끝까지 곁을 지키는 존재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노래한 작품입니다.
이 시의 깊이와 사용된 기법을 나누어 설명해 드릴게요.
1. 시의 내용 및 주제 설명
이 시에서 말하는 '그'는 단순히 인간적인 연인을 넘어선, 종교적 차원의 절대자(신)나 근원적인 사랑을 상징합니다.
►고독의 순간: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아무도 기도하지 않을 때"처럼 철저히 소외된 순간에 '그'는 등장합니다.
►희생과 동질화: '그'는 단순히 나를 위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가 죽었을 때 "나의 죽음이 되어준" 존재입니다. 나의 고통에 완전히 동참(Empathy)하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무조건적 사랑: 마지막 구절의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이라는 표현은 시간과 인과관계를 초월한 선행적인 사랑을 의미하며, 독자에게 깊은 위안을 줍니다.
2. 시에 사용된 주요 표현 기법
이 시는 정호승 시인 특유의 서정적이면서도 단단한 문체가 돋보입니다.
① 반복과 변주 (Parallelism)
"그는 ~한 사람이었다"라는 문장 구조를 반복하여 리듬감을 형성하고,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미지를 층층이 쌓아 올립니다.
"~할 때"라는 상황 설정을 반복함으로써 화자가 처한 부정적 상황과 '그'의 긍정적 행위를 선명하게 대비시킵니다.
② 은유와 상징 (Metaphor & Symbolism)
바다: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에서 바다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정화하는 절대적인 사랑의 크기를 상징합니다.
죽음: 실제 육체적 죽음이라기보다, 삶의 가장 밑바닥이나 영혼의 고갈 상태를 의미하는 상징적 장치로 쓰였습니다.
③ 역설적 표현 (Paradox)
"나의 죽음이 된 사람": 누군가의 죽음이 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상대의 고통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심리적 진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기다리기 전에 이미 사랑하고": 시간의 순서를 뒤집음으로써, 이 사랑이 어떤 조건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임을 강조합니다.
④ 시각적·청각적 이미지의 조화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청각), 무릎을 꿇고 우는 모습(시각), 촛불이 꺼진 어둠(시각) 등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시적 상황을 독자가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한 줄 평
이 시는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사랑'을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여, 슬픔 속에서도 따뜻한 구원을 느끼게 하는 정호승 시인의 대표적인 서정시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신앙'은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인 뿌리입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천주교) 신자이며, 그의 세례명은 '프란치스코'입니다.
하지만 그의 신앙은 단순히 종교적 교리에 갇혀 있지 않고, 시적 상상력을 통해 보편적인 인간애와 구원의 서사로 확장됩니다. 정호승 시인의 신앙이 시에 투영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1. '낮은 곳'을 향한 가난한 마음
그의 신앙은 화려한 성당 안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웃과 소외된 존재들 곁에 머뭅니다.
방금 읽으신 시 「그는」에서처럼,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위해 무릎을 꿇고 울어주는 존재는 가톨릭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는 "슬픔도 힘이 된다"고 말하며,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 안에서 신의 얼굴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2. 고난과 부활의 미학
정호승의 시에는 '못', '흉터', '눈물', '죽음' 같은 시어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기독교적 가치관인 '십자가의 고난'을 상징합니다.
고통을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영성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과정으로 봅니다.
죽음을 넘어 바다가 되고(씻김), 상처가 꽃이 되는 과정은 신앙적 의미의 '부활'과 연결됩니다.
3. 포용적인 영성 (불교적 색채와의 만남)
정호승 시인의 흥미로운 점은 가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 속에 불교적 윤회사상이나 자비의 정신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부드러운 대화를 나누는 부처님"을 상상하기도 하며, 종교 간의 벽을 허물고 오직 '사랑'이라는 절대 가치에 집중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신앙이 특정 종교의 틀에 박힌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연민에서 출발했음을 보여줍니다.
▶요약하자면
정호승 시인에게 신앙이란 "슬퍼하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며, 그의 시는 곧 "문자로 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시를 쓰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는 기도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안의 밥 한 그릇이 되는 시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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