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움은 돌보다 무겁다 / 강형철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는
당신이 사랑하는 나조차
미워하며 질투하였습니다.
이제 당신이 가버린 뒤
고생대 지나 빙하기를 네 번이나 건너왔다는
은행나무에 기대어
견딘다는 말을 찬찬히 읊조립니다.
무엇이 사라진 것인가요
당신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내가 지워진 것도 아닌데
심연으로 가라앉는 돌멩이
앞서 깊어가는,
저기 그리움이 보입니다.
강형철,『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창작과 비평사,
▶이 시를 논평 해석
강형철 시인의 「그리움은 돌보다 무겁다」는 사랑의 열병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부재의 무게'를 정적인 언어로 응시하는 작품입니다. 2002년에 발표된 시집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에 수록된 이 시는, 감정의 과잉 대신 침전하는 그리움의 속성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세 가지 핵심 관점으로 해석해 드립니다.
1. 사랑의 역설: 소유욕에서 허무로
시의 전반부는 사랑의 지독한 폐쇄성을 보여줍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나조차 미워하며 질투하였습니다": 이는 사랑이 정점에 달했을 때의 심리를 꿰뚫는 구절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라면, 설령 그 대상이 '나' 자신일지라도 독점하고 싶어 하는 강렬한 소유욕과 자의식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격정적 사랑'의 기억은 후반부의 '정적인 그리움'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슬픔을 증폭시킵니다.
2. 시간의 확장: 억겁의 세월을 견디는 법
사랑이 떠난 뒤, 시적 화자는 은행나무에 기댑니다.
"고생대 지나 빙하기를 네 번이나 건너왔다는": 화자는 개인의 슬픔을 우주적, 지질학적 시간으로 확장합니다. 은행나무는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릴 만큼 유구한 세월을 견딘 존재입니다.
그 거대한 시간 앞에 기대어 "견딘다"는 말을 읊조리는 것은, 지금의 이 그리움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짊어져야 할 거대한 숙명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3. 이미지의 전도: 돌보다 무거운 그리움
시의 백미는 마지막 구절의 '가라앉음'에 있습니다.
"심연으로 가라앉는 돌멩이 / 앞서 깊어가는": 보통은 무거운 돌이 먼저 가라앉는다고 생각하지만, 시인은 그리움이 돌보다 먼저 심연에 도달한다고 말합니다.
물리적인 질량보다 정서적인 무게(그리움)가 더 크기에, 그리움은 돌보다 더 빨리, 더 깊게 화자의 내면 바닥으로 추락합니다. 당신도 나도 사라진 것이 아니지만, '관계의 상실'이 가져온 이 공허함은 존재 자체를 심연으로 끌어내리는 무거운 힘이 됩니다.
📝 총평
이 시는 '그리움'이라는 추상적인 감정을 '낙하하는 돌'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시각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사랑할 때의 뜨거움이 '질투'였다면, 이별 후의 차가움은 '빙하기'와 '심연'으로 표현됩니다.
결국 시인은 그리움을 극복하려 애쓰기보다는, 그 무게를 온전히 느끼며 은행나무처럼 묵묵히 견뎌내는 고독한 단독자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시의 서늘하면서도 묵직한 분위기가 마음에 닿으셨나요?
이글이 시를 공부하고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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