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움 (이용악)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아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이용악 시인의 <그리움>은 일제강점기 유이민의 비애와 고향에 대한 절절한 향수를 함축적인 언어로 그려낸 명시입니다. 시인이 처한 차가운 현실과 고향을 향한 따뜻한 염원이 '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선명하게 대비되는 작품이죠.
이 시를 깊이 있게 감상하기 위한 몇 가지 포인트와 구조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1. 핵심 모티프: '눈'의 이중성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눈(함박눈)'입니다.
함박눈: 북쪽 고향에 내리는 눈은 고향의 모든 아픔과 상처를 덮어주는 '복된 눈'이자,
시인의 그리움을 투영하는 매개체입니다.
잉크병 얼어드는 밤: 반면, 시인이 처한 현실은 잉크마저 얼어붙는 혹독하고 냉혹한 공간입니다. 이 차가운 현실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간절하게 만듭니다.
2. 감상 포인트: '백무선'과 '작은 마을'
백무선: 백암과 무산을 잇는 철길로, 당시 함경도의 험난한 지형을 상징합니다.
그 위를 '느릿느릿' 달리는 화물차는 고단한 민중의 삶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너를 남기고 온: 여기서 '너'는 구체적으로는 가족일 수도 있고,
넓게는 시인이 두고 온 고향의 소중한 가치들을 의미합니다.
"작은 마음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라는 구절에는
자신이 챙겨주지 못한 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안녕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시 작법
이용악의 <그리움>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폭발시키기보다, 치밀하게 계산된 이미지의 대비와 공간의 확장을 통해 그리움을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이 시에 적용된 주요 작법들을 분석해 드립니다.
1. 수미상관(首尾相關)의 변주
시의 처음과 끝이 유사한 구조를 반복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효과: 1연에서 던진 "눈이 오는가"라는 질문이 마지막 연에서 반복되면서,
답을 얻지 못한 채 계속되는 그리움의 지속성과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또한, 시 전체에 안정감을 부여합니다.
2. 감각의 대비: '냉혹한 현실' vs '따뜻한 환상'
시인은 온도와 색채를 활용해 시적 화자의 상황을 극명하게 대비시킵니다.
차가운 현실: "잉크병 얼어드는 밤", "검은 지붕". 이는 화자가 처한 고립감과 일제강점기라는 암담한 시대적 상황을 시각·촉각적으로 보여줍니다.
따뜻한 그리움: "함박눈", "복된 눈". 눈은 차가운 속성을 가졌지만, 여기서는 고향의 아픔을 덮어주는 포근하고 축복적인 이미지로 치환되어 나타납니다.
3. 시선의 확장과 이동 (원경에서 근경으로)
작가는 독자의 시선을 유도하며 공간감을 형성합니다.
원경 (1~2연): 북쪽 고향, 험한 벼랑, 백무선 철길 등 멀리 있는 광막한 풍경을 조망합니다.
중경 (3연): 고향에 남겨진 '너'와 '작은 마음'으로 시선이 좁혀집니다.
근경 (4연): 다시 현재, 잉크병이 얼어붙는 '방 안'으로 돌아와 화자의 내면적 고통(잠을 깨어)에 집중합니다.
4. 구체적 지명과 소재의 배치
막연한 그리움이 아니라 실존하는 공간을 배치하여 사실감을 높였습니다.
백무선(白茂線): 함경북도 백암과 무산을 잇는 실제 철도 이름입니다. 이를 통해 시의 배경이 되는 유이민의 고달픈 삶을 구체화하고, 척박한 북쪽 변방의 이미지를 강화합니다.
5. 의문형 어미와 영탄적 어조
"~내리는가", "어쩌자고", "차마" 등의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확신할 수 없는 고향의 소식을 묻는 의문형 어미는 간절함을 더하며, "차마 그리운 곳"과 같은 표현은 억눌렀던 감정이 순간적으로 울컥 솟아오르는 효과를 줍니다.
요약하자면
이 시는 '차가운 방 안(현재)'에서 '눈 내리는 북쪽(과거/고향)'을 상상하는 이원적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잉크병이 어는" 극한의 추위 속에서 역설적으로 "복된 눈"을 떠올리는 화법이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핵심 장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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