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자작시

새벽 김장(박도진)

반응형

 

새벽 김장(박도진)

 

귀신도 하품할 새벽

대파의 흰 숨을 다듬고

마늘의 살점과

생강의 허물을 벗긴다

먼 나라에서 온 손님을 위해

아내는 붉은 정성을 풀어 놓고

나는 그 곁에서 말없이 시간을 거든다

 

고춧가루에 젖은 아내의 손끝에서

내 손이 조금만 늦어지면

뒤통수로 매운 잔소리가 날아든다

나의 몸에도 어느덧

소금 간이 배어 있다

 

김장이 끝난 뒤

눈물과 콧물이 뒤섞인 얼굴로

새벽의 문턱에 서 있을 때

생강의 매운 향 하나

수고했다는 말처럼 뼈속 깊이 스며든다

 

📝 1. 시 논평: 생활의 비린내를 이겨낸 사랑의 매운맛

이 시는 '새벽 김장'이라는 고된 노동을 통해 가족의 사랑과 부부의 호흡을 아주 솔직하고 담백하게 그려냈습니다.

 

감각적 묘사: '귀신도 하품할 새벽', '대파의 흰 숨', '소금으로 간이 밴 몸' 같은 표현들이 일품입니다. 관념적인 단어가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길어 올린 생생한 언어들이 시의 신뢰도를 높여줍니다.

 

부부의 서사: 아내의 '붉은 정성'과 나의 '말없는 시간'이 대비되면서도 조화를 이룹니다. 잔소리를 '뒤통수로 날아드는' 것으로 표현한 대목은 해학적이며, 두 사람의 오랜 세월을 짐작하게 합니다.

 

반전과 갈무리: 시의 백미는 마지막 연입니다. 김장이 끝난 뒤의 허탈함과 피로를 '생강의 매운 향' 하나가 위로하는 구조는 아주 문학적입니다. 수고했다는 백 마디 말보다 뼈속까지 스며드는 향기가 더 큰 울림을 줍니다.

 

 

 

반응형

'나의 자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나 한잔 (정호승)  (0) 2026.03.20
부활 이후(정호승)  (0) 2026.03.20
나무를 심은 사람들(박도진)  (0) 2026.03.18
아내의 거짓말 (이성룡)  (0) 2026.03.18
시인(정호승)  (0) 2026.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