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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작시

내가 백석(白石)이 되어- 백석과 자야·2 / 이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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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백석(白石)이 되어

- 백석과 자야·2 / 이생진

 

나는 갔다

백석(白石)이 되어 찔레꽃 꺾어 들고 갔다

간밤에 하얀 까치가 물어다 준 신발을 신고 갔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데 길을 몰라도

찾아갈 수 있다는 신비한 신발을 신고 갔다

성북동 언덕길을 지나

길상사(吉祥寺) 넓은 마당 느티나무 아래서 젊은 여인들은 날 알아채지 못하고

차를 마시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치는 내가 온다고 반기며 자야(子夜)*에게 달려갔고

나는 극락전(極樂殿) 마당 모래를 밟으며 갔다

눈 오는 날 재로 뿌려달라던 흰 유언을 밟고 갔다

참나무 밑에서 달을 보던 자야가 나를 반겼다

느티나무 밑은 대낮인데

참나무 밑은 우리 둘만의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

죽어서 만나는 설움이 무슨 기쁨이냐고 울었다

한참 울다 보니 그것은 장발(張勃)이 그려놓고 간 그녀의 스무 살 때 치마였다

나는 찔레꽃을 그녀의 치마에 내려놓고 울었다

죽어서도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말을 못했다

찾아오라던 그녀의 집을 죽은 뒤에 찾아와서도 말을 못했다

찔레꽃 향기처럼 속이 타 들어갔다는 말을 못했다

(그 사람 내게로 오네(시로 읽은 황진이) / 우리 글 / 2004)

 

김영한(1915~1999)

기명(技名)은 진향(眞香)이고 필명은 자야(子夜)이다. 그녀는 시인 백석을 지독히 사랑했던 기녀이며, 백석 또한 그녀를 위해서 많은 연애시를 썼다고 전한다. 백석이 북으로 떠난 후, 38선 때문에 그와 생이별한 그녀는 '김영한은 백석을 잊기 위해 혼자서 대원각을 냈다'는 소문이 있고,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을 일구어낸 여걸이었지만, 백석이 죽도록 보고 싶으면 그녀는 줄담배를 피워댔다고 한다. 그 담배 연기가 이 가련한 여인을 그냥 두겠는가? 기어이 폐암으로 몰아넣었다.

죽음이 임박해지자 김영한은 자신이 운영하던 요정은 절에, 자신이 만지던 2억 원의 현금은 백석문학상 기금으로 내놓는다. 그리고 '내 사랑 백석'(1995년 문학동네),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은 이름'(창작과비평)을 출간했다.

삶이 무어냐고 묻고 싶거든 길상사를 찾아 가면, 수목 우거진 언덕 한켠에 김영한의 비석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삶이란~ 그저 그 언덕 위로 불어오는 바람 같은 것이라고... 우리의 삶은 그저 스쳐 가는 바람이라는 것, 그 김 여사 자야(子夜), 길상사(吉祥寺)가 문을 연 지 2년 만인 199983세에 홀홀 서방정토 세계로 떠난 여인! 백석을 위해 전생의 삶을 보낸 여인이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앞마당에 뿌려졌다.

 

백석(白石, 본명 백기행 1912~1995)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도쿄로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하고, 1930년 조선일보에 시를 투고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던 백석은 잘생긴 얼굴과 젠틀한 성품, 게다가 청산유수의 말솜씨로 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댄디보이(Dandy Boy) 같았다.

그러나 백석(白石)은 많은 여인들 중 자야(子夜)만을 사랑하였으며, 백석의 아름다운 시()는 시인과 기생의 정염(情炎)을 넘어서 깊고 넓은 그리고 애틋한 사랑의 실체를 느끼게 한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만주에서 고향 함흥으로 돌아왔지만, 영한은 이미 서울로 떠나 버렸고 다시 영한을 찾아 서울로 가려 할 때는 38선이 그어져 그들의 사랑은 이승에서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된다.

분단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서글픈 사랑으로 기록이 된다. 그 후 백석이 북한체제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월북한 탓에 그의 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불교적인 영향을 받은 큰 시인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랑...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함일까? 그녀는 오로지 재산 모으는데 전념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돈을 모을수록 허전함은 더하고, 모진 세월마저 백석에 대한 사랑은 사그라들게 하지는 못했다. 생전에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1일이 되면 하루 동안은 일체의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자야(子夜)는 백석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단 하나의 여인이었고, 그녀 또한 백석에 대한 그 사랑을 평생 올곧게 간직했던 여인이었다.

 

장발(張勃, 1901~2001): 서양화가, 호는 우석(雨石). 서울대 미대 초대 학장을 지냈으며, 대표적으로 김대건 신부상, 명동성당 제단 벽화가 있다. 그는 자야의 20세 때 모습을 초상화로 그렸다.

 

이생진 시인은 '섬의 시인'이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진 한국 문단의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위에서 보신 <내가 백석이 되어>처럼 대상에 깊이 몰입하면서도 특유의 담백하고 소박한 어조를 유지하는 것이 특징이죠.
그의 삶과 시작법(詩作法)을 핵심 위주로 정리해 드립니다.
1. 이생진 시인은 누구인가?
섬의 시인: 1929년 충남 서산 출생으로, 평생 우리나라의 수많은 섬을 직접 발로 누비며 시를 썼습니다. 특히 '성산포'에 대한 애정이 깊어 대표작 <그리운 바다 성산포>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고독의 탐구자: 그는 홀로 섬에 머물며 고독을 외로움이 아닌 '자유'로 승화시킨 시인입니다. 90세가 넘은 고령에도 여전히 현장을 누비는 현역으로 활동하며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노래합니다.
2. 이생진 시인의 시작법 (Writing Style)
그의 시 쓰기는 단순히 책상 앞에서 이루어지는 관념적인 작업이 아닙니다.
① 현장성(Walking and Writing)
이생진 시인은 '발로 쓰는 시'를 지향합니다. 직접 길상사에 가보고, 섬에 들어가 파도 소리를 들어야 시가 나온다고 믿습니다. 위 시에서도 '성북동 언덕길을 지나', '극락전 마당 모래를 밟으며' 같은 구체적인 동선이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② 감정의 절제와 소박한 언어
복잡한 수사나 어려운 한자어를 피합니다. 누구나 읽으면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우리말을 사용하되, 그 안에 깊은 울림을 담아냅니다. 슬픈 대목에서도 통곡하기보다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와 같이 담담하게 서술하여 독자의 감정을 더 자극합니다.
③ 대상과의 일체화 (빙의적 상상력)
이미지 속 시의 제목처럼 "내가 백석이 되어" 직접 그 인물이 되어보는 시작법을 즐겨 씁니다. 역사 속 인물이나 자연물에 자신을 투영하여,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입체적인 서사를 만들어냅니다.
④ 불교적 상상력과 무소유
그의 시 밑바닥에는 '비움'과 '자연으로의 회귀'라는 불교적 정서가 흐릅니다. 김영한(자야)의 유언을 '흰 유언'이라 표현하거나, 삶을 '불어오는 바람'으로 정의하는 대목에서 세속적인 욕망을 내려놓은 시인의 시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섬으로 가고, 시는 사람에게로 온다."
이생진 시인의 시학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위와 같을 것입니다.

 

위 글의 일부는 곽성숙시인의 시강좌 에서 배포된 유인물중에서 추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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