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자작시

폐업 공인중개사(박도진)

반응형

 

폐업 공인중개사(박도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개업공인중개사였다

버스정류장 옆

모퉁이를 돌아앉은 단층집

오래 비어 있던 그 자리를 보며

나는 다만

중개의 욕심을 품었을 뿐

 

느린 시간에 기대어 서면

거래 하나쯤은 이루어질 것 같았지만

세상 일은 끝내 내 짐작을 비껴간다

카페에서

민물 장어집으로,

다시 전복집으로

간판은 바람처럼 바뀌고

나는 그 곁에서 늘 거래의 문턱만 서성였다

 

한때

꼬마빌딩은 서민의 꿈이었다

임대료라는 이름의 햇빛 아래

눅눅한 노후를 말리던 시절

그러나 이제는

자고 나면 문 앞에 쌓이는 배달 물건들

따뜻한 한 끼마저

손길 대신 버튼으로 도착하는 세상

 

상가의 불빛이

어둠 속으로 잦아들 때

나는 비로소 문을 닫았다

가게가 아니라 비대해진 욕심의 문을

 

시대의 물살은 늘 한 발 앞서 흐르고

나는 그 굽이 뒤편에서 조용히 발을 거둔다

오늘 나는

폐업공인중개사로 불린다

 

 

<폐업 공인중개사>

이 시는 단순한 사업의 실패를 넘어, '공간'의 가치가

'비대면''속도'에 밀려가는 시대적 변화를 공인중개사라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담담하고도 서글프게 그려낸 수작입니다.

 

📋 시평 (Commentary)

시각적 대비의 탁월함: '햇빛 아래 노후를 말리던 시절'이라는 과거의 평화로운 비유와 '문 앞에 쌓이는 배달 물건'이라는 현재의 건조한 풍경이 대비되어, 상가 몰락의 이유를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선명하게 전달합니다.

 

성찰적 태도: 폐업을 단순히 '망했다'는 실패로 규정하지 않고, '욕심의 문을 닫았다'거나 '조용히 발을 거두었다'고 표현함으로써 상실감을 철학적 수용으로 승화시킨 점이 인상적입니다.

시대상의 반영: '손 대신 버튼'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세태를 '따뜻한 한 끼마저'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담아내어, 디지털화된 세상이 잃어버린 온기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명품시와 사라질 시의 차이점

 

말하자면, 차이는 한 가지가 아니라 겹겹의 결에서 드러납니다.

감동은 시작일 뿐입니다.

누구나 마음을 건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저명한 시인의 시는

감동이 지나간 자리에도 오래 머무는 힘이 있습니다.

읽고 난 뒤에도

문장 하나가 가슴에 남아

시간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그것이 첫 번째 차이입니다.

깊이 역시 단순한 어려움이 아닙니다.

어려운 말이 깊은 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적은 말로 많은 세계를 담는 힘

그 응축이 깊이입니다.

한 줄이 한 사람의 생애를 대신하고,

하나의 이미지가 시대 하나를 건드릴 때

비로소 깊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잘 드러나지 않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삶의 밀도입니다.

저명한 시인의 시에는

오래 견디고, 오래 바라보고, 오래 잃어본 시간이

말 속에 스며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시는

잘 쓴 문장이 아니라 살아낸 흔적으로 읽힙니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차이는 이것입니다.

덜어냄의 용기입니다.

일반인의 시는 더하려 하고, 유명한 시는 버립니다.

설명을 버리고, 감정을 줄이고, 남겨야 할 것 하나만 남깁니다.

그래서 읽는 이는

비워진 자리에서 자기 삶을 채워 넣게 됩니다.

한 줄로 말하면 저명한 시인의 시는 감동을 주는 시가 아니라,

읽는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 다시 살아나는 시입니다.

 

 

 

 

 

반응형

'나의 자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침 출근길(박도진)  (0) 2026.04.27
영산홍(연산홍) (도종환/이기철)  (1) 2026.04.26
라일락꽃을 보면서(박재삼)  (0) 2026.04.26
등나무 아래서 (이해인)  (1) 2026.04.25
그림자의 빛깔(손광은)  (0) 2026.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