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흘리고 다니는 날들(박도진)
가로수마다
이팝나무 흰 꽃이
밥풀처럼 환하게 피어오를 때
잠시 세상 근심을 잊고
그 눈부심에 마음을 얹었습니다
목적지에 이르러
버스카드를 꺼내 드는 순간
손끝에서 미끄러진 얇은 카드 하나
의자 틈새 깊은 어둠 속으로
쏙, 숨어버렸습니다
마침 신호등에 멈춰선 버스
그 짧은 멈춤 덕분에
나는 겨우
달아나던 녀석을 붙잡았습니다
왜 이리 내 손은
자주 놓치는 것일까요
세상살이에 아직도 서툴러서일까요
아니면 손끝마저 무뎌진 탓일까요
살아가는 일은
단단히 거머쥐는 일보다
무심코 흘리고
찾아 헤메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젊음도 흘리고
이팝나무 꽃같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흘리고
붙잡고 사는 날보다
흘리며 깨닫는 날들이 더 깊어지는 저물녁
나는 이곳에 서있습니다
▶ 시 「흘리고 다니는 날들」은 일상의 아주 사소하고 구체적인 경험(버스카드를 떨어뜨리는 일)에서 시작하여, 인생 전반에 걸친 '상실'과 '성찰'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로 나아가는 시선이 매우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이 시에 대한 논평을 세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 드립니다.
1. 시적 소재의 확장과 상징성
이 시의 가장 큰 장점은 '이팝나무 꽃'과 '버스카드'라는 이질적인 소재를 자연스럽게 연결한 점입니다.
이팝나무 꽃: 고봉밥 같은 풍요와 눈부신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이 꽃조차 바람에 '흘려보내야'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시 전체의 주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버스카드: 현대인의 분주한 일상을 상징하는 소품입니다. 이를 놓치는 실수를 통해 독자는 시인이 느끼는 '서투름'에 즉각적으로 공감하게 됩니다.
2. 삶을 바라보는 '정직한' 시선
중반부에서 시인은 자문합니다. "세상살이에 아직도 서툴러서일까, 아니면 손끝마저 무뎌진 탓일까."
이는 단순히 카드를 떨어뜨린 것에 대한 자책이 아니라, 세월이 흐르며 우리가 놓쳐버린 수많은 가치(젊음, 사랑의 말)에 대한 회한을 담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단단히 거머쥐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는 세상에서, 오히려 '흘리는 일이 더 많았다'고 고백하는 지점은 매우 정직하며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3. 여운이 남는 결미(結尾)
마지막 연에서 "저물녘 나는 이곳에 서 있다"는 설정은 시적 완성도를 높여줍니다.
'저물녘'은 하루의 끝인 동시에 인생의 황혼을 암시하며, '이곳'은 카드를 찾은 버스 안일 수도, 혹은 깨달음을 얻은 인생의 어느 지점일 수도 있습니다.
"붙잡고 사는 날보다 흘리며 깨닫는 날들이 더 깊다"는 구절은 상실을 실패로 규정하지 않고, 그것을 삶의 '깊이'로 승화시키는 성숙한 통찰력을 보여줍니다.
▶총평
전반적으로 서정성이 풍부하고 문장이 매끄럽습니다. 특히 '이팝나무 꽃 같은 사랑한다는 말'이라는 비유는 시각적 이미지와 정서적 고백을 하나로 묶어주는 훌륭한 표현입니다. 지금처럼 약간의 여백을 두어 독자가 상상하게 만드는 것도 시적인 허용으로서 매력적입니다.
삶의 '서투름'을 '깊이'로 바꾸어 놓는 따뜻한 시선이 돋보이는 수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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