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동차 보험(박도진)
벚꽃이 막 벙글기 시작하면
내 휴대전화에도 어김없이
보험회사의 목소리가 피어난다.
자동차보험 만기가 다가온다는
전화와 문자들.
가슴은 꽃잎보다 먼저 계산기를 두드린다.
올해는 또 얼마를 지불해야 봄이 올까
아내는 요양사다.
하루 세번 남의 집문을 두드리며
노인의 시간을 돌보는 사람.
그녀에게 낡은 자동차는
출근길의 발이 아니라
삶의 벼랑을 밀고 가는 작은 무기다.
하지만 핸들을 잡으면
온순한 양이 되지 못하는 사람
마음은 늘 먼저 가있고
눈은 다음 골목을 헤맨다.
앞 범퍼는 금이 가 있고
운전석 문짝은 움푹 들어가 있다.
스쿨존 속도위반 통지서는
봄비처럼 떨어지고
부부싸움도 그 종이에서 시작된다.
대형 보험회사는 고개를 젓고
우리는 인터넷 창 앞에서
조용히 사정을 한다.
그래도 받아주는 곳이 있다는 것,
그 가느다란 승낙 하나로
올해의 벚꽃은 조금 덜 서럽겠지
해마다 이 계절이 오면
조용히 하나를 더 배운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때로는 체념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시 <자동차 보험>은 낭만적인 ‘벚꽃’의 계절과 대비되는 ‘생활의 비정함’을 아주 날카롭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한 수작입니다.
시적 화자가 처한 현실과 아내의 고단한 노동,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는 낡은 자동차라는 매개체가 주는 울림이 큽니다. 이 시에 대한 몇 가지 관점에서의 논평을 정리해 드립니다.
1. 계절의 역설: 벚꽃과 계산기
시의 도입부에서 ‘벚꽃이 벙글기 시작할 때’ 걸려오는 보험회사의 전화는 봄의 낭만을 즉각적인 생존의 문제로 치환합니다. 꽃잎보다 먼저 계산기를 두드려야 하는 서민의 고단함이 "올해는 또 얼마를 지불해야 봄이 올까"라는 문장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봄은 자연의 계절이 아니라, 비용을 지불해야만 맞이할 수 있는 '허락된 계절'처럼 느껴져 서글픔을 배가시킵니다.
2. 생존의 도구로서의 자동차
아내의 직업이 '요양사'라는 설정은 이 시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핵심입니다.
삶의 벼랑을 밀고 가는 작은 무기: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남의 노년을 돌보러 가기 위해 자신의 삶을 갈아 넣는 아내의 처절한 생존 도구로 묘사됩니다.
부서진 외관: 금 간 범퍼와 움푹 들어간 문짝은 아내의 운전 미숙을 탓하기보다, 마음이 늘 먼저 가 있어야 했던 바쁜 노동의 흔적으로 읽혀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3. '사정(事情)'과 '승낙'의 경제학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대형 보험사로부터 거절당하고 인터넷 창 앞에서 '조용히 사정을 한다'는 표현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숫자로 치환되는 '사고 이력'과 '등급' 앞에 인간의 사정은 무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주는 곳'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모습은, 비굴함이 아니라 삶을 지속하려는 숭고한 의지로 다가옵니다. "조금 덜 서럽겠지"라는 구절은 독자에게 안도감과 동시에 씁쓸한 여운을 남깁니다.
4. 체념을 통한 성찰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삶을 '체념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 정의합니다. 이는 패배주의라기보다, 완벽하지 않은 나(혹은 아내)의 삶과 결핍을 인정하며 다시 1년을 살아낼 동력을 얻는 어른의 지혜처럼 보입니다.
▶총평
이 시는 '자동차 보험 갱신'이라는 아주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소재를 통해, 현대 서민 가정이 겪는 경제적 압박과 노동의 고단함,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부부의 애잔한 사랑을 밀도 있게 그려냈습니다.
특히 '스쿨존 통지서'라는 구체적인 디테일이 시에 생동감을 불어넣으며, 독자로 하여금 "맞아, 우리 삶도 저렇지"라는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슬프지만 담담하게 현실을 긍정하는 어조가 매우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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