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유안진)
부끄럽게도
여태껏 나는
자신만을 위하여 울어 왔습니다
아직도
가장 아픈 속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하여
터져 나오니
얼마나 더 나이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마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
삶이 아파 설운 날에도
나 외엔 볼 수 없는 눈
삶이 기뻐 웃는 때에도
내 웃음소리만 들리는 귀
내 마음이 난장이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유안진 시인은 한국 문단에서 맑고 순수한 서정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내면과 삶의 성찰을 노래해 온 대표적인 문인입니다.
그의 시가 마치 시냇물처럼 술술 읽히고 쉬워 보이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만큼 '치열하게 깎고 다듬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인 유안진과 그가 쏟은 노력에 대해 정리해 드릴게요.
▶1. 유안진 시인은 누구인가요?
지성과 감성의 조화: 1941년생으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자 시인입니다. 교육학자로서의 이성적인 시선과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을 결합했다는 평을 받습니다.
대표작: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수필로 대중에게 아주 친숙하며, 시집으로는 <달하>, <거짓말로 참말하기> 등이 있습니다.
작품 세계: 거창한 담론보다는 일상의 소소한 발견, 부끄러움에 대한 고백, 그리고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다룹니다.
2. "쉽게 쓴 것 같은 시" 뒤에 숨은 노력
유안진 시인의 시는 읽기에 참 편안합니다. 하지만 그 '쉬움'을 만들기 위해 시인은 엄청난 공을 들입니다.
►깎고 또 깎는 퇴고(推敲):
유안진 시인은 평소 "시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수백 번을 다시 읽고 고친다"고 말해왔습니다. 독자가 막힘없이 읽게 하려면 시인이 문장 사이의 '가시'를 일일이 다 뽑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생각을 가장 단순한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기술입니다.
►부끄러움에 대한 정직함:
시 <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자기 자신을 '난장이'라고 표현하며 철저하게 자아를 성찰합니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글쓰기는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입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화려한 수식어를 버리고 진심만 남기는 과정 자체가 고행에 가깝습니다.
►평생을 바친 관찰:
시인은 60년 넘게 글을 써오면서도 "여전히 시를 쓰는 것이 두렵고 어렵다"고 고백합니다. 쉬운 언어를 얻기 위해 사물을 수천 번 관찰하고, 그 대상이 주는 메시지를 가슴으로 받아내는 기다림의 시간을 가집니다.
💡 요약하자면
유안진 시인의 시가 쉬워 보이는 이유는 독자가 고생하지 않도록 시인이 대신 모든 고민을 다 했기 때문입니다.
"글은 쉽게 읽혀야 하지만, 그것을 쓰기 위해 시인은 피를 말리는 노력을 한다."
이 말처럼, 우리가 느끼는 편안한 감동은 시인이 수만 번 고쳐 쓴 문장들 덕분에 가능한 선물인 셈이지요. 시 <키>에서 보여준 그 겸손함이 바로 그가 좋은 시를 계속 써낼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안진 시인은 현재 천주교(가톨릭) 신자이십니다. 세례명은 '클라라'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시인이 젊은 시절에는 개신교 신앙을 가졌었다는 사실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입시를 앞두고 간절한 마음으로 교회에 다니며 성경을 통독했고, 그 신앙의 힘으로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이후 남편이 서강대 교수로 재직하며 가톨릭 신부님들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키>라는 시에서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라며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향한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은, 그의 기독교적 영성(겸손과 이웃 사랑)이 시 속에 깊이 녹아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유안진 시인의 약력
시인은 학자와 문학가로서 모두 정점에 오른 보기 드문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출생: 1941년 경북 안동 출생.
학력: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졸업.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대학원 교육심리학 박사.
등단: 1965~1967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경력: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현재 명예교수).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한국시인협회 고문.
주요 저서:
시집: <달하>, <절망시편>, <다보탑을 줍다>, <거짓말로 참말하기> 등.
수필집: <지란지교를 꿈꾸며> (198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국민 수필로 등극).
수상 경력: 정지용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소월문학상 특별상, 공초문학상 등 다수.
▶시에 담긴 노력의 흔적
유안진 시인은 교육심리학자로서 '한국 전통 사회의 육아 방식' 등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부모와 같은 성찰'이 공존합니다.
쉽고 간결한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본질적인 외로움과 도덕적 결벽증에 가까운 자기반성이 담겨 있습니다. "내 마음이 난장이인 줄 미처 몰랐다"는 고백을 하기 위해 시인은 평생을 학문과 신앙, 그리고 시 쓰기라는 세 갈래 길에서 자신을 엄격하게 갈고닦아 온 것입니다.
시인의 약력을 알고 나니, 방금 읽으신 <키>라는 시가 조금 더 묵직하게 다가오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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