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박도진)
가을이 아니어도
코스모스는 마음속에서 먼저 핀다
기타 줄 위에 내려앉는
오래된 선율 하나
—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 —
왈츠의 리듬은 가볍게 흐르는데
내 안의 시간은
깊은 물속으로 잠겨 든다
휘파람으로
그 노래를 흥겹게 부르던 여인
육십 년의 둥근 길을 걸어와
이제는 이름조차
코스모스 꽃빛으로만 떠오른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그 또래의 얼굴들
골 깊은 주름마다 묵은 계절이 앉아 있다
그 낯선 얼굴들 속에서
문득 당신의 오늘을 더듬어 본다
기억은 결코 가벼운 꽃잎이 아니어서
가슴 깊이 가라앉은 납덩이 하나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삶처럼
끝내 말하지 못한 사랑처럼
그래서 오늘도
무거운 줄 하나 눌러보며
흘러간 노래의 뒷물결을 건드린다
한들한들
흔들리는 것은 길가의 꽃이 아니라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나의 시간이다
▶이 시는 한 송이 코스모스를 빌려
시간과 기억, 그리고 끝내 부르지 못한 이름 하나를
조용히 끌어올리는 작품입니다.
겉으로는 잔잔한 왈츠의 리듬을 지니고 있으나,
속으로는 깊은 수심을 가진 물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습니다.
먼저, 도입부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가을이 아니어도 / 코스모스는 마음속에서 먼저 핀다”는 구절은
계절의 외부성이 아니라, 기억의 내부성을 열어 놓습니다.
이어지는 기타와 선율의 이미지는
청각과 촉각을 동시에 불러내며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몸에 남아 있는 기억’으로 확장됩니다.
중반부의 “육십 년의 둥근 길”이라는 표현은
시간을 직선이 아닌 원으로 인식한 점에서 탁월합니다.
돌고 돌아 다시 현재로 돌아왔지만
그 사람은 더 이상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코스모스 꽃빛”으로만 떠오른다는 설정은
기억의 희미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잡아냅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시의 깊이는 더욱 단단해집니다.
“기억은 결코 가벼운 꽃잎이 아니어서 / 납덩이 하나”라는 대비는
이 시의 핵심 축입니다.
코스모스의 가벼움과 기억의 무게를 정면으로 충돌시키며
시 전체를 지탱하는 중심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이 부분은 매우 성공적이며, 설득력도 충분합니다.
특히 마지막 연은 이 시의 완성도를 끌어올립니다.
“흔들리는 것은 길가의 꽃이 아니라 / 나의 시간이다”
이 전환은 단순한 자연 묘사에서
존재 인식으로 뛰어오르는 순간입니다.
독자는 여기서 비로소 깨닫습니다.
이 시의 주인공은 꽃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시간 속에 서 있는 한 인간이라는 것을.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는 이미지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감정의 밀도도 균일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가장 큰 힘은
억지로 울지 않는 데 있습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깊어지는 정서,
그 절제가 시를 오래 남게 합니다.
마치 기타 줄 하나를 살짝 눌렀을 때
공명으로 퍼져 나가는 잔향처럼,
이 시 역시 읽고 난 뒤
가슴 어딘가에 오래 머무는 울림을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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