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분간/ 나희덕
이 꽃그늘 아래서
내 일생이 다 지나갈 것 같다.
기다리면서 서성거리면서
아니, 이미 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기다리는 오분간
아카시아꽃 하얗게 흩날리는
이 그늘 아래서
어느새 나는 머리 희끗한
노파가 되고,
버스가 저 모퉁이를 돌아서
내 앞에 멈추면
여섯살배기가 뛰어내려 안기는 게 아니라
훤칠한 청년 하나 내게로 걸어올 것만 같다.
내가 늙은 만큼 그는 자라서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보겠지.
기다림 하나로도 깜박 지나가 버릴 生,
내가 늘 기다렸던 이 자리에
그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쯤
너무 멀리 나가버린 그의 썰물을 향해 떨어지는 꽃잎,
또는 지나치는 버스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내 기다림을 완성하겠지.
중얼거리는 동안 꽃잎은 한 무더기 또 진다.
아, 저기 버스가 온다.
나는 훌쩍 날아올라 꽃그늘을 벗어난다.
▶나희덕 시인의 <오 분간>은 일상의 짧은 순간을 통해 삶 전체의 무게와 속도를 통찰해내는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1. 시 해설: 기다림이라는 짧은 생(生)
이 시는 아이를 마중 나간 어머니가 버스를 기다리는 '오 분'이라는 짧은 시간을 공간적 배경으로 합니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단순히 버스를 기다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짧은 시간 속에서 '한 인간의 일생'을 투영해 냅니다.
▴기다림의 확장: 화자에게 '오 분'은 단순히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노후와 아이의 성장을 한꺼번에 경험하는 생의 축소판입니다. 아카시아 꽃그늘 아래서 화자는 자신이 늙어버리고, 아이는 어느새 청년이 되어 돌아올 것 같은 상상을 합니다.
▴삶의 통찰: "기다림 하나로도 깜박 지나가 버릴 生"이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삶이란 무언가를 기다리고 무언가를 보내며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현실로의 귀환: 마지막에 버스가 도착하자 화자는 훌쩍 날아올라 꽃그늘(상상의 공간)을 벗어납니다. 이는 삶의 덧없음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현재의 삶(아이를 안아주고 일상을 살아가는 것)으로 충실히 복귀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2. 시의 시작법(표현상 특징)
이 시는 일상의 사소한 순간을 관조적인 시선으로 포착하여 깊은 울림을 주는 시작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상상의 전이(轉移)와 확대: ‘오 분’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짧은 시간을 ‘한 사람의 일생’이라는 거대한 시간으로 확대하는 상상력이 돋보입니다. 현실과 상상을 자연스럽게 오가며 시적 깊이를 더합니다.
▴대조적 이미지의 활용: ‘꽃그늘’과 ‘버스를 기다리는 서성거림’이라는 정적인 이미지 속에, 아이가 자라나고 세월이 흐르는 동적인 시간의 흐름을 대조적으로 배치했습니다.
▴꽃잎의 상징성: 떨어지는 ‘꽃잎’은 시간의 흐름, 늙음, 그리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아이의 삶을 상징하며 시각적인 쓸쓸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전달합니다.
▴순환적 구조: 아이를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해, 버스가 오자 현실로 돌아오는 구조를 취함으로써, 삶은 결국 무수한 기다림의 연속이자 그 기다림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3. 나희덕 시인과 시세계
▴나희덕 (1966~ )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면서 등단했습니다. 따뜻하고 서정적인 언어로 인간의 고통과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 시인 중 한 명입니다. 현재는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나희덕 시인의 시세계
나희덕 시인의 시는 크게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닙니다.
◦따뜻한 서정성과 존재에 대한 연민: 타인의 고통이나 사회적 약자의 삶, 그리고 자연물에 대해 따뜻한 시선으로 연민을 보냅니다. 그녀의 시 속에서 자연은 인간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긴밀히 연결된 존재로 형상화됩니다.
◦생태적 상상력과 모성: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바탕으로, 모성(母性)의 원형을 시적 언어로 승화시킵니다. 아이를 기다리는 <오 분간>처럼, 누군가를 지극히 아끼고 기다리는 마음을 통해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웁니다.
◦절제된 언어와 깊은 통찰: 화려한 기교보다는 정갈하고 절제된 언어를 사용합니다. 일상의 풍경 속에서 삶의 비극이나 허무함을 발견하되, 그것을 슬픔에 머물게 하지 않고 따뜻한 이해와 수용으로 승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나희덕의 시는 고통을 응시하는 법을 배우게 하고, 그 고통조차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하는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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