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아골 다랑이논 (이성부)
이 마을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이 깊은 곳에 어떤 사람들이 흘러들어와
마을을 만들었는지
나는 굳이 알려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빈 산골짜기로 올라와서
비탈에 하나씩 둘씩 돌을 쌓고
땅을 고르고
마침내 씨앗 뿌려 질긴 목숨 끌어갔음을 본다
참으로 사람이야말로 꽃피는 짐승
가슴 가득히 불덩이를 안고
피와 땀을 뒤섞이게 하는
그것이 눈물겨워 나도 고개 숙인다
구례군 토지면 직전마을 피아골 들머리
아침 햇발에 층층 쌓인 다랑이논들
거친 숨결 내뿜는 것을 본다
달뜨기재(이성부)
지리산에 뜨는 달은
풀과 나무와 길을 비추는 것 아니라
사람들 마음속 지워지지 않는
눈물자국을 비춘다
초가을 별들도 더욱 가까워서
하늘이 온통 시퍼런 거울이다
이 달빛이 묻은 마음들은
한줄로 띄엄띄엄 산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고
귀신들도 오늘은 떠돌며 소리치는 것을 멈추어
그림자 사이로 고개 숙이며 간다
고요함 속에서 나를 보고도 말 걸지 않는
고개에 솟는 달 잠깐 쳐다보았을 뿐
풀섶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고른다
밝음과 그림자가 함께 흔들릴 때마다
잃어버린 사랑이나 슬픔 노여움 따위가
새로 밀려오는 소리를 듣는다
*달뜨기재: 지리산 동쪽 웅석봉과 연결된 산줄기의 고개 이름.
이성부(李盛夫) 시인: 민중의 생명력을 노래한 시인
이성부 시인은 1960~70년대 한국 문학사에서 '민중 시인'이자 '생명력의 시인'으로 불리는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단순히 감상적인 시를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억눌린 시대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일어서는 민중의 강인한 의지를 자연물(벼, 물 등)에 투영하여 표현했습니다.
1. 이성부 시인은 누구인가?
출생-사망: 1942년 전남 광주 출생 ~ 2012년 별세.
등단: 196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문학적 특징: 초기에는 현대인의 고독과 허무를 다루었으나, 이후 역사와 사회 현실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특히 '벼'와 같은 상징을 통해 공동체 의식과 끈질긴 생명력을 강조했습니다.
말년에는 전국의 산을 직접 오르며 느낀 깨달음을 담은 산행 시집들을 펴냈으며, 그 대표작이 『지리산』입니다.
2. 대표작 소개
이성부 시인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시 두 편을 소개해 드립니다.
① 「벼」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작)
이 시에서 '벼'는 바로 우리 주변의 평범한 민중을 상징합니다. 혼자 있을 때는 약하지만, 서로 기대어 숲을 이룰 때 발휘되는 강인한 힘을 찬양합니다.
죄 한 점 없이 피어나는 / 햇살을 배경으로 / 벼는 서로 어우러져 / 기대고 산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 마음들을 보아라.
② 「전라도(全羅道)」
이성부 시인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로, 한과 슬픔의 땅이었던 전라도의 정서를 강렬한 생명력으로 풀어냈습니다.
3. 시집 『지리산』의 의미
시집 『지리산』은 시인이 70여 차례나 지리산을 종주하며 쓴 시들을 엮은 것입니다. 여기서 '지리산'은 단순한 산이 아닙니다.
한국 현대사의 아픔(빨치산, 전쟁 등)을 품고 있는 역사의 현장.
모든 것을 포용하고 다시 살아나게 하는 어머니 같은 생명력.
시인은 산을 오르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자기반성을 하고, 결국 삶의 비극을 극복하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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