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의 목소리 — 박영순 님에게 (박도진)
1980년 5월 27일
전남 도청의 새벽은
사람의 시간이 아니었다
핏빛 죽음이 낮게 엎드린 시간
창문 틈새로
축축한 어둠이 밀려들고
거리마다 번져 오던 군홧발 소리
도시는 숨죽인 짐승처럼 떨고 있었다
스물한 살, 꽃보다 여리던 여학생 하나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움켜쥔다
“시민 여러분,계엄군이 오고 있습니다”
가녀린 숨결은 확성기를 타고
잠든 골목을 흔들었고
울먹이던 어머니들의 가슴을 두드렸다
“우리 학생들을, 시민들을 살려주십시오”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살고 싶다는 청춘들의 울음과
끝까지 사람을 버리지 않으려는
한 도시의 양심이 떨고 있었다
서슬 퍼런 총구보다 먼저 떨렸던 건
아직 피어나지도 못한 젊음이었다
“이제는 죽는구나”
서늘한 공포가 목덜미를 움켜쥐었어도
그녀는 달아나지 못했다
아니
달아나지 않았다
그 새벽의 가두 방송은
한 인간의 생애보다 길고
한 시대의 어둠보다 깊었다
마침내 무너진 새벽.
도청은 침묵 속에 짓밟히고
그녀는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
상무대 차가운 방
눈이 가려진 채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린 밤
젊은 날의 뼈마디마다
고문의 시퍼런 멍이 박혀 갔다
철창의 시간은 끝났으나
세상은 그녀를 풀어주지 않았다
폭도라는 주홍글씨
양아치라는 손가락질
취업의 문턱마다 차갑게 닫히는 문
승진에서 밀려나 주저앉던 세월
광주의 총성은
한 사람의 생애를 관통한 채
반세기가 흐르도록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살아남았다
떠나고 싶었던 광주에서
기적처럼 한 사람을 만나
겨우 다시 사람 곁으로 돌아왔고
오래 숨죽였던 증언은
마침내 세상 밖으로 걸어나왔다
우리는 기억한다
어둠을 가르던 그 애절한 새벽의 목소리를
죽어가던 도시의 심장부에서
끝까지 사람을 살려 달라고 외치던
한 여전사의 숨결을
광주의 잔다르크여
모진 풍파 속에서도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당신의 눈물 위에
빚을 진 채 살아갑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피해자가 도리어
눈물로 역사를 증명해야 하는 나라,
그 부끄러운 시간 앞에 서면
가슴이 시리도록 미안해집니다.
그리고 문득
시간의 폐허 위에 홀로 서서 나에게 묻습는다
만약 그 새벽 그 자리
그 목소리 앞에
내가 있었다면
과연 나는 어떤 사람으로 서 있었을까.
2024년 12월 3일
느닷없이 다시 내려 앉은 계엄의 밤
잠들었던 역사의 영혼들이
산 자들을 흔들어 깨우고
마치 1980년의 박영순이 돌아온듯
유튜브의 화면 너머로
또다시 가두방송이 흐른다
시대를 깨우는 목소리는 죽지 않는다
1980년의 새벽은
2024년의 밤을 일으켜 세우며
지금도 우리 곁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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