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남에서 온 편지 / 이지엽
아홉 배미 길 질컥질컥해서
오늘도 삭신 꾹꾹 쑤신다
아가 서울 가는 인편에 쌀 쪼간 부친다
비민하것냐만 그래도 잘 챙겨묵거라
아이엠 에픈가 뭔가가 징허긴 징헌갑다
느그 오래비도 존화로만 기별 딸랑 하고 지난 설에도 안 와브럿다
애비가 알믄 배락을 칠 것인디
그 냥반 까무잡잡하던 낯짝도 인자는 가뭇가뭇하다
나도 얼릉 따라 나서야 것는디 모진 것이 목숨이라 이도저도 못하고 안 그냐.
쑥 한 바구리 캐와 따듬다 말고 쏘주 한잔 혔다
지랄 놈의 농사는 지먼 뭣 하냐
그래도 자석들한테 팥이랑 돈부, 깨, 콩, 고추 보내는 재미였는디
너할코 종신서원이라니…
그것은 하느님하고 갤혼하는 것이라는디…
더 살기 팍팍해서 어째야 쓸란가 모르것다
너는 이 에미 더러 보고 자퍼도 꾹 전디라고 했는디
달구똥마냥 니 생각 끈하다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
▶ 이지엽 시인의 <해남에서 온 편지>에 대하여
이지엽 시인의 시 <해남에서 온 편지>는 IMF 경제 위기라는 시대적 아픔 속에서,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절절한 사랑과 그리움을 전라도 사투리를 통해 극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1. 시 해설: 고단한 삶을 녹여내는 어머니의 사랑
이 시는 1990년대 후반,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IMF 경제 위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안고 있습니다.
▴상황적 배경: 아홉 배미(논)를 일구며 삭신이 쑤시는 고된 농사일 속에서도, 서울에 있는 자식에게 쌀과 곡식을 보내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나타납니다. "아이엠 에프"라는 경제적 환란 속에서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처절하면서도 따뜻합니다.
주요 갈등 및 정서:
▴자식에 대한 애틋함: "느그 오래비도... 안 와브럿다"에서 보이는 가족의 해체 위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에게 보낼 곡식을 준비하는 모습에서 한국적 어머니의 전형적인 희생정신이 드러납니다.
▴종교와 현실의 간극: 딸이 '종신서원(수녀가 됨)'을 했다는 소식을 접한 어머니의 당혹감이 느껴집니다. 하느님과 결혼한다는 딸을 보며, 자식을 곁에 두고 싶은 인간적인 욕망과 딸의 선택을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사이에서 느끼는 갈등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시적 분위기: '쑥 한 바구리', '소주 한 잔', '복사꽃' 등의 소재를 통해 시골의 풍경을 감각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봄날의 아름다운 복사꽃을 보며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라고 하는 대목은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의 고독을 극대화합니다.
2. 이지엽 시인: 약력과 문학 세계
이지엽(李志燁, 1958~) 시인은 전라남도 해남 출신으로, 현대 시 문단에서 '토속적 서정'을
가장 잘 구현하는 시인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약력:
1958년 전남 해남 출생.
198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며 등단.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역임.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현대시의 발전에 기여해 왔습니다.
▶이지엽시인의 문학적 세계:
▴고향과 어머니: 그의 시 세계 중심에는 언제나 '해남'이라는 고향과 그곳의 풍경, 그리고 어머니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토속적인 언어와 정서를 바탕으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착을 노래합니다.
▴서정성과 절제: 단순히 향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고통을 직시하면서도 이를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는 서정적인 태도를 견지합니다. 한국인의 정서 밑바닥에 흐르는 '한(恨)'을 아름다운 언어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3. 전라도 방언: '구수한 정취'인가 '이해의 장벽'인가
방언(사투리)은 문학에서 양날의 검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에 대한 긍정적인 면과 한계를 정리해 드립니다.
● 방언의 '구수한 맛' (긍정적 측면)
현장감과 생동감: 표준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과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예를 들어 "징허긴 징헌갑다"라는 표현은 IMF의 고통을 막연한 단어로 설명할 때보다 훨씬 더 뼈저리게 와닿게 만듭니다.
▴인물의 전형성 확보: 이 시의 화자는 '해남의 어머니'입니다. 표준어를 썼다면 인위적이었을 감정이, 사투리를 통해 그 인물이 실존하는 듯한 생생한 인격을 부여받게 됩니다.
▴정서적 교감: 사투리는 읽는 이로 하여금 고향의 정취를 느끼게 하거나, 화자와 독자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좁혀주는 역할을 합니다.
● 방언의 '이해의 약점' (비판적 측면)
▴지역적 폐쇄성: 해당 지역 출신이 아닌 독자에게는 낯설고, 의미를 유추하는 데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는 독자의 몰입을 방해하는 '언어적 진입장벽'이 됩니다.
▴세대 간 단절: 표준어 교육을 받고 자란 젊은 세대에게는 사투리 어휘 자체가 생소하여, 시가 전달하려는 핵심 정서에 도달하기 전에 해석의 과정에서 감동이 반감될 우려가 있습니다.
▴보편성의 상실: 방언이 너무 짙으면 지역 문학으로 치부되거나, 시의 가치가 '그 지역 사람들만의 이야기'로 축소될 위험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지엽 시인은 이 방언이라는 장치를 통해 "어머니라는 존재의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했습니다. 다소 난해할 수 있는 약점이 있음에도 방언을 고집한 것은, 그 언어 속에 담긴 '한(恨)'과 '사랑'이 표준어의 매끈함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거칠고 뜨거운 진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시를 읽으실 때 사투리 하나하나의 뜻을 완벽히 이해하려 애쓰기보다는, 그 문장이 주는 음율과 어머니의 탄식, 그리움의 정서를 그대로 느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시인 이지엽 씨가 종신서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도록 명확히 설명해 드릴게요.
1. 시적 화자와 시인의 구분
이 시에서 '종신서원(수녀가 되는 과정)'을 한 주체는 시인 본인이 아니라, 시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딸'입니다.
이 시는 '빙의적 화자(Persona)' 기법을 사용한 작품입니다. 즉, 시인 이지엽(남성)이 '해남에 사는 어머니'라는 가상의 인물로 스스로를 투영하여 쓴 시입니다.
시인(이지엽): 남성 시인이며, 교수로 활동했습니다.
시적 화자: 시 속의 '나(이 에미)'로 등장하는 해남의 어머니.
종신서원의 대상: 화자의 '딸'.
2. 왜 이런 형식을 취했나요?
시인은 본인의 직접적인 경험을 서술하는 대신, '어머니'라는 화자를 빌려옴으로써 다음과 같은 효과를 극대화했습니다.
▴객관적 거리 두기: 시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썼다면 감정이 과잉되거나 주관적일 수 있었겠지만, 어머니의 입장을 빌려 씀으로써 당시 IMF 시대의 고통과 자식을 향한 모성애를 훨씬 더 절절하고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보편적 감정의 형상화: '자식을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애틋함'과 '딸이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어 느끼는 미묘한 복잡한 심정'을 다루기 위해 가장 적합한 화자로 '어머니'를 선택한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이 시는 시인 이지엽이 우리네 어머니들의 마음을 빌려와, 그 시대의 아픔과 자식에 대한 사랑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시인 본인이 수녀가 된 것은 아니니 안심하고(?)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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