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금 늦었지만 괜찮아 ( 연우)
[2026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조카만의 규칙
보이지 않는 선을 그려놓고 나는 넘어오지 말라고 한다
아이들은 동시에 여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오른손은 송곳니 없는 개의 입 왼손에는 칼을 쥔다
아직 울지 마요 이모가 바라는 걸 구해올게요 말한다
무엇을 구해올 거니?
할머니를 구해올 거예요
어디에서?
할머니 안에서요
나는 등뼈 하나를 놓친다
데구르르 굴러가다 고모가 밟고 넘어진다
고모는 우울증 환자라 실비도 없는데 큰일 났대요
울지 않는 아이들은 씩씩하게
옷장 속에서 튀어나오고 쌓아둔 방석 위로 뛰어내린다 정말
용감하구나
그 안에 뭐가 있었니?
방금 전까지
할머니가
더 낮게
허리를 접는다
무너지지 않게 손끝으로
아이의 말 밑을 받친다
조카는 벽을 두드린다
벽이 아니라 뻥 뚫린 초원을
할머니를 내놔!
두 주먹이 하얗다
그러면 뱀처럼 얇고 길어진 할머니가 쑥 하고 튀어나올 것처럼
아이는 뛰어다니며 모든
사람들의 표정에 대해 간섭한다
조카가 손가락질하면 다들 입을 뗀다
밥맛이 좋군요
비가 오지 않네요
그제야 주변이 생겨난 것처럼
조카는 옆 호실에 뛰어들어갔다가 하얀 그릇을 손에 쥐고 나온다
그건 돌려줘야 한단다
하지만 어른들이 내게 쥐여 줬어요 밥을 꼭꼭 씹어먹으라고 했어요
아이는 수저로 식탁을 두드리다
가장 아낀다는 분홍 스티커를 할머니 사진에 붙인다
내가 정말 아끼던 사람이었어요...
아이니까요
아이니까
그래서 더 무섭다
조카가 내 등을 두드린다 무언가가
쑥
뼛속에서 나오려는 것처럼
나는 무릎을 모으고
작아진다
그제야 조카가
기쁜 얼굴로 나를 안아 준다
▶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읽다 보면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
"왜 이렇게 난해하고 어렵게만 쓸까?" 하는
답답함이 드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에요.
이 시는 치매나 큰 병으로 앓아누운(혹은 세상을 떠난) 할머니의 병실(혹은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상황을, '아이(조카)의 천진난만한 놀이'라는 렌즈를 통해 역설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 시가 왜 좋은 평가를 받았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는지 차근차근 설명해 드릴게요.
1. 시의 내용 쉽게 풀어보기 (무슨 이야기일까?)
이 시의 배경은 환자들과 슬픔이 가득한 병원(또는 장례식장)으로 보입니다.
"실비(실손보험)도 없는데", "옆 호실", "할머니 사진" 같은 단어들이 힌트죠.
"할머니 안에서 할머니를 구해올 거예요"
아이의 눈에도 지금 침대에 누워있거나 사진 속에 있는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가 아닙니다.
병마에 갇힌 할머니를 '구해오겠다'며
칼과 개(왼손과 오른손)로 변신해 옷장과 방석 위를 뛰어다니며 영웅 놀이를 합니다.
▴"나는 등뼈 하나를 놓친다"
어른들은 슬픔과 간병에 지쳐 몸과 마음의 중심(등뼈)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고모는 우울증에 걸려 있고, 집안 분위기는 엉망입니다.
▴"밥맛이 좋군요 / 비가 오지 않네요"
아이가 "할머니 내놔!" 하고 벽을 두드리고,
주변 어른들의 표정을 간섭하자, 어른들은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억지로 괜찮은 척 뻔한 일상적인 말("밥맛이 좋네", "날씨 좋네")을 뱉어냅니다.
아이의 순수함이 오히려 어른들의 슬픈 연극을 시작하게 만드는 순간입니다.
▴"아이니까 그래서 더 무섭다"
아이는 슬픔의 본질을 정확히 모르면서도,
본능적으로 이 공간의 비극을 느끼고 있습니다.
가장 아끼는 스티커를 영정(혹은 아픈 할머니) 사진에 붙이며
"내가 정말 아끼던 사람이었어요..."라고 말하는 아이의 모습은,
어른들에게 위로가 되기보다 오히려 가슴을 후벼파는 섬뜩함(무서움)으로 다가옵니다.
▴마지막 장면
조카가 이모(화자)의 등을 두드리자,
참았던 눈물이나 슬픔이 '쑥' 삐져나오려고 합니다.
이모가 무릎을 모으고 울음을 참으며 작아지자,
조카는 그제야 미션을 완수한 영웅처럼 기쁜 얼굴로 이모를 안아줍니다.
2. 왜 신춘문예 작품은 이렇게 어렵고 난해할까?
질문하신 것처럼 신춘문예 시들은 왜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울까요?
여기에는 문학계의 몇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① '낯설게 하기'의 법칙
시인들은 우리가 다 아는 슬픔을 "슬프다, 눈물이 난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익숙한 감정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문학에서는 '낯설게 하기'라고 합니다.
이 시에서는 '가족의 투병/죽음'이라는 무거운 슬픔을
'아이의 칼싸움 놀이'와 '분홍 스티커'라는 엉뚱한 소재와 결합해 낯설게 표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문장이 꼬이고 어려워집니다.
② 논리적 비약과 생략
일반적인 글은 원인 -> 결과로 이어지지만,
시는 중간 과정을 툭툭 건너뾥니다.
"데구르르 굴러가다 고모가 밟고 넘어진다" 같은 표현은
실제로 고모가 뼈를 밟고 넘어졌다는 게 아니라,
화자의 무너진 마음(등뼈)이
가족들에게 도미노처럼 불행과 부담으로 번지는 과정을 시적으로 비약해 표현한 것입니다.
③ 평론가와 심사위원의 취향
신춘문예는 대중성보다는
"이 시인이 얼마나 새롭고 개성 있는 언어를 구사하는가?"를 심사합니다.
누구나 읽고 바로 이해되는 시는 "식상하다"는 평을 듣고 탈락하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선작들은 점차 더 복잡하고, 상징적이며,
독자가 수수께끼를 풀듯 유추해야 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 한 줄 요약
이 시는 비극적인 슬픔 속에서 천진난만하게 노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역설적으로 어른들이 느끼는 슬픔과 무력감을 극대화한 작품입니다.
신춘문예 시가 어려운 것은 정상입니다.
첫눈에 이해되지 않더라도,
시가 그려내는 ' 서늘하고 슬픈 분위기' 자체를
흑백 영화를 보듯 느껴보시는 것도 시를 즐기는 좋은 방법입니다.
'나의 자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뿌리에게 (나희덕)<신춘문예응모작 작품 점검 열가지-2 권갑하) (1) | 2026.05.25 |
|---|---|
| 남해 금산 (이성복)<신춘문예 응모작 작품점검 열가지-1 권갑하) (0) | 2026.05.24 |
| 부치지 않은 편지 (노래: 김광석) (0) | 2026.05.23 |
| 상록수 (노래: 양희은)(김민기 작사 작곡) (0) | 2026.05.23 |
| 붉은 사과 (박도진) (0) | 2026.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