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화가」 (이승희)
내 손가락 끝에서 세상이 시작된다
사각거리는 소리는 어둠을 갉아먹는 소리
칸을 나누고 그 속에 가두는 것은
비단 주인공뿐만이 아니다
나의 밤과, 나의 꿈과, 나의 지독한 가난까지
검은 잉크 속에 가두어
말풍선으로 내뱉게 한다
지우개 가루처럼 쌓이는 시간들 속에서
나는 매일 새로운 얼굴을 깎아내고
세상에 없는 길을 그려 넣는다
🔍 시의 주요 포인트
창조의 고독: 만화가는 텅 빈 종이 위에 칸을 나누고 인물을 그려 넣습니다. 시인은 이를 "어둠을 갉아먹는 소리"라고 표현하며,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작업의 치열함을 묘사합니다.
말풍선의 의미: 마음속에 담아둔 슬픔이나 가난, 꿈을 '말풍선'이라는 만화적 장치를 통해 밖으로 꺼내놓는 과정은 만화가에게 있어 일종의 구원이자 소통입니다.
지우개 가루와 시간: 그림을 그리다 지우고 다시 그리는 과정에서 나오는 지우개 가루를 '쌓여가는 시간'으로 비유한 점이 인상적입니다.
💡 만화가라는 직업의 시적 매력
만화가는 시인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칸(Frame): 시가 행과 연으로 이루어지듯, 만화는 칸으로 이야기를 구성합니다.
생략과 함축: 만화의 칸과 칸 사이(Gutter)는 독자의 상상력이 채워지는 공간인데, 이는 시의 여백과 비슷합니다.
펜 끝의 무게: 잉크 한 방울로 누군가를 웃게도, 울게도 만드는 힘을 가졌다는 점에서 매우 낭만적인 존재로 그려지곤 하죠.
이승희 시인은 ‘슬픔을 돌보는 시인’이라 불리며, 일상의 비애를 식물적 상상력과 투명한 문체로 그려내는 작가입니다. 질문하신 시 「만화가」를 쓴 주인공이기도 하죠.
그의 약력과 시세계를 정리해 드립니다.
▶ 이승희 시인 약력
출생: 1965년 경북 상주 출생.
등단: 1997년 《시와 사람》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냉장고」가 당선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주요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2006)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2012)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17)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2024)
수상: 전봉건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 수상.
🌿 이승희의 시세계: '슬픔의 반려자'
이승희 시인의 시는 화려한 수사보다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생의 이면을 응시합니다.
1.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
그의 시에서 '슬픔'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반려(伴侶)와 같습니다. 슬픔에 함몰되어 절망하기보다는, 그 슬픔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쓰다듬는 과정을 통해 독자에게 잔잔한 위로를 건넵니다.
2. 식물적 상상력
시인은 맨드라미, 작약, 나무 등 식물의 이미지를 자주 사용합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묵묵히 시간을 견디는 식물의 속성을 통해,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끝내 무언가를 피워내려는 생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3. '물속'과 '밤'의 공간
최근 시집에서는 '물속'이라는 공간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단지 침잠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수면 위보다 더 환하고 평온한 '내면의 안식처' 혹은 '기억의 저장소'로 그려집니다.
"나는 나보다 나를 조금 더 슬퍼할 것 같은 그림자 혹은 슬픔과 함께 눕습니다."
이승희 시인은 위와 같이 슬픔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가장 고독한 순간에 오히려 가장 따뜻한 문장을 길어 올리는 시인입니다.
▶그의 시 「만화가」 역시, 좁은 칸(현실)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펜 끝으로 새로운 길을 그려내는 만화가의 모습에서 시인 자신의 '쓰는 삶'을 투영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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