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서
▶박경리 선생의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 수록된 「옛날의 그 집」은, 한국 문학의 거목이었던 그녀가 삶의 끝자락에서 길어 올린 고백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1. 「옛날의 그 집」 작품 해설
이 시는 박경리 선생이 원주에 머물며 치열하게 문학을 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삶의 고통과 적막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그리고 그 모든 세월을 지나온 지금의 홀가분한 심경을 담고 있습니다.
►시적 공간(그 집):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와 소쩍새 소리가 들리는 적막한 집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선생이 홀로 세상을 견뎌내며 문학을 완성하던 고독의 요새입니다.
►사마천을 생각하며: 사마천은 궁형이라는 치욕을 겪으면서도 『사기(史記)』를 집필했습니다. 선생은 자신의 고통(남편과 아들을 잃은 슬픔 등)을 사마천의 고통에 빗대어, 글쓰기를 유일한 삶의 지탱 수단으로 삼았음을 보여줍니다.
►짐승들: 대문 밖의 늑대, 여우, 하이에나는 선생의 창작 활동을 방해하거나 상처를 주었던 세상의 차가운 시선, 혹은 삶의 풍파를 상징합니다.
►결말의 의미: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는 구절은 삶의 모든 무게를 견뎌낸 뒤, 이제는 육체와 명예조차 초월한 노년의 평온과 달관을 보여줍니다. 문학을 위해 평생을 바친 한 인간이 도달한 숭고한 경지입니다.
2. 박경리(朴景利, 1926~2008) 약력
박경리 선생은 한국 현대 문학의 어머니로 불리는 대문호입니다.
출생 및 시대적 배경: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해방, 6.25 전쟁이라는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었습니다.
비극과 극복: 한국 전쟁 중 남편을 잃고, 뒤이어 아들마저 사고로 떠나보내는 개인적인 참극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그 슬픔을 '글'이라는 도구로 승화시켰습니다.
대표작 『토지』: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6년에 걸쳐 집필한 대하소설 『토지』는 한국 문학사상 가장 거대한 서사로, 한국인의 삶과 한(恨), 역사를 집대성한 작품입니다.
말년: 원주로 내려가 텃밭을 일구며 생명 사상을 설파했고, 끝까지 글을 쓰며 노년을 보냈습니다.
3. 소설가 박경리가 시를 썼던 이유
박경리 선생은 평생 소설로 세상과 소통했지만, 말년에는 시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더 솔직하고 직접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녀가 시를 쓴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압축된 생의 고백: 방대한 서사를 다루는 소설과 달리, 시는 짧은 언어 속에 감정을 농축합니다. 긴 인생을 마감하며 선생은 소설이라는 거대한 틀을 벗어던지고, 자신이 느낀 삶의 본질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가장 정직한 언어(시)로 기록하고 싶어 했습니다.
►삶의 마침표: 유고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말처럼, 그녀에게 시는 세상에 남길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소설이 세상을 향한 외침이었다면, 시는 자신을 향한 위로이자 정리였습니다.
►문학적 자유: 평생 『토지』라는 거대한 숙제를 짊어지고 살았던 선생에게, 시는 형식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자연과 생명, 인간의 고독을 노래할 수 있는 문학적 안식처였습니다.
박경리 선생의 이 시는 고통 속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치열하게 살아가며 겪는 '적막'조차도 결국은 나를 지켜주는 힘이 될 수 있음을,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홀가분함이 기다리고 있음을 따뜻하게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왜 조그마한 항구 도시 통영에는 유명한 예술가들이 많은가?
조그마한 항구도시 통영이 '예향(藝鄕)'으로 불리며 수많은 거장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역사적 배경, 천혜의 자연환경, 그리고 개방적인 문화적 토양이 어우러진 필연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1. 300년 '통제영'이 빚어낸 문화적 저력
가장 큰 이유는 조선 시대 300년간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이곳에 설치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단순한 군사 기지를 넘어, 통제영은 전국에서 뛰어난 장인들이 모여드는 문화·예술의 중심지였습니다.
12공방: 통제영에는 군수 물자를 만들기 위한 12공방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나전칠기, 대발, 가죽신 등 최고의 공예품들이 생산되었습니다. 이러한 장인 정신과 세련된 미적 감각이 지역 사람들의 피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예술을 귀하게 여기고 즐기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2. 예술적 영감을 자극하는 천혜의 자연
통영은 한려수도의 중심지로, 아름다운 바다와 섬, 그리고 파도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은 "내 음악의 근원은 통영 밤바다의 파도 소리"라고 고백했습니다.
화가 전혁림과 시인 김상옥, 유치환 등도 통영의 독특한 빛깔과 풍경을 작품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대문호 박경리 선생 역시 통영의 정서와 역사를 『김약국의 딸들』과 같은 작품에 깊이 투영했습니다.
3. 개방성과 자생적 문화 네트워크
항구도시 특유의 개방성은 외부 문화를 빠르게 수용하고 이를 자신들의 예술로 승화시키는 힘이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지역 예술인들이 자발적으로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여, 중앙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문학, 음악, 미술, 연극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예술을 꽃피웠습니다. 이들은 서로 교류하며 한국 근현대 예술을 이끄는 거장들로 성장했습니다.
통영을 여행하시면 이들의 발자취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념관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통영은 이러한 역사와 자연이 빚어낸 '예술의 고향' 그 자체입니다.
박경리 선생을 비롯해,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의 음악적 뿌리가 된 도천테마공원, 그리고 통영의 빛을 캔버스에 담았던 전혁림 화백의 미술관 등은 오늘날까지도 통영이 단순한 항구도시를 넘어 문화예술의 도시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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