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새들의 고향(박도진)
장사 잘되던 길목 아래층마다
은행들이 둥지 틀고 있었지
사람들은 계절도 잊은 채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드나 들었다
인터넷 뱅킹이 파도처럼 밀려오자
동네 은행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고
초여름 더위 속
종이 통장 하나 때문에
멀어진 은행을 찾아 타박타박 걷는다
하나둘 내 곁을 떠나가는 아픔들
친구들도
또렷하던 기억들 마저
무엇이 그리 바쁜지 등 뒤로 사라져 간다
요즈음 보기 힘든 참새떼
그 작은 새들은
어디에서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 시 <참새들의 고향>은 급변하는 디지털 문명 속에서 사라져가는 아날로그적 풍경과
그로 인해 느끼는 개인의 소외감을 '은행'이라는 구체적인 소재를 통해
감각적으로 그려낸 수작입니다.
이 시에 대한 논평을 세 가지 핵심 키워드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1. 공간의 변주: '방앗간'에서 '신기루'로
▴시의 도입부에서 은행은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사람들이 북적대던 생기 넘치는 공간으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인터넷 뱅킹이라는 '파도'가 밀려오자, 그 물리적 공간은 속절없이 쓸려 내려갑니다.
▴대비의 효과: 과거의 '둥지'였던 은행과 현재의 '자취를 감춘' 은행의 대비는 독자로 하여금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편리함 이면의 씁쓸함을 시각적으로 느끼게 합니다.
2. '타박타박'의 미학: 육체적 수고와 소외
초여름 더위 속에서 종이 통장 하나를 들고 멀리 떨어진 은행을 찾아가는
화자의 '타박타박' 걷는 발소리는 이 시의 정서적 중심입니다.
손가락 클릭 한 번으로 끝나는 디지털 세상에서,
굳이 몸을 움직여야만 하는 화자의 행위는 시대에 뒤처진 '낙오'가 아니라,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마지막 예우이자 애처로운 몸짓으로 읽힙니다.
이는 단순히 은행에 가는 행위를 넘어, 현대인이 잃어버린 '느림의 가치'를 상기시킵니다.
3. 확장된 상실감: 참새는 어디로 갔을까
시의 후반부에서 화자는 은행의 소멸을 개인적인 삶의 영역으로 확장합니다.
하나둘 내 곁을 떠나가는 아픔들 / 친구들도 / 또렷하던 기억들 마저
▴주제의 심화: 은행(외부 공간) → 친구(관계) → 기억(내면)으로 이어지는 상실의 연쇄 고리는 독자의 공감을 자아냅니다.
▴상징적 마무리: 마지막 연의 '참새'는 과거의 활기찼던 우리 이웃이자,
화자 본인, 혹은 순수했던 시절의 꿈을 상징합니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묻는 질문은 정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것들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연민을 담은 여운으로 남습니다.
▶총평
이 시는 '참새-방앗간-은행'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비유를 현대적인 상황(인터넷 뱅킹)에 절묘하게 접목했습니다.
문명은 앞을 향해 쾌속으로 달려가지만,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거나
혹은 그 속도에 지친 인간의 뒷모습을
'초여름 더위 속의 산책'으로 차분하게 그려낸 서정성이 돋보입니다.
잊혀가는 것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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