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못 위의 잠(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은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나희덕 시인의 <못 위의 잠>은 고단한 삶을 지탱하는 가족애와 아버지의 희생을 절제된 문장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1. '실업의 호주머니'의 뜻
시구 중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이라는 표현은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경제적 궁핍: '실업(失業)'은 말 그대로 직업을 잃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호주머니에 돈 대신 '때 묻은 호두알'만 들어있다는 것은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하기 힘든 경제적 결핍과 고단한 현실을 상징합니다.
▴가장으로서의 고뇌: 호두알은 딱딱합니다. 호주머니 속에서 이를 만지작거리는 행위는 막막한 현실(실업) 속에서 가장이 느끼는 초조함, 불안, 그리고 어떻게든 버텨보려는 의지를 시각화한 것입니다.
2. 시 <못 위의 잠> 해설
이 시는 좁은 제비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벽에 박힌 '못 하나' 위에서 졸고 있는 아비 제비의 모습과, 현실의 고통을 견디며 가족을 지키는 인간 아버지의 모습을 교차시킵니다.
▴핵심 소재 '못': 제비에게 '못'은 잠시 발을 붙일 최소한의 공간입니다. 이는 화자의 아버지에게는 '가족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버팀목'이자 '희생'을 의미합니다.
▴대조적 상황: 새끼와 어미가 잠든 안락한 둥지와 달리, 찬 바람을 맞으며 못 위에서 '꾸벅거리는' 아비의 모습은 가족의 평화를 위해 스스로 고난을 짊어지는 가장의 숙명을 보여줍니다.
▴주제: 고단한 삶의 무게를 견뎌내는 아버지의 숭고한 사랑과 그에 대한 화자의 연민과 이해.
3. 나희덕 시인의 약력과 시세계
📝 주요 약력
출생: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등단: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며 활동 시작.
경력: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 국내 주요 문학상을 휩쓴 한국 현대시의 대표적인 시인입니다.
🌿 시세계 (풍경과 내면의 조화)
나희덕 시인의 시는 대체로 '따뜻한 모성적 시선'과 '생명에 대한 깊은 성찰'이 특징입니다.
▴기다림과 보듬음: 초기에는 주로 식물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대상(어머니, 자연, 소외된 존재)을 따뜻하게 보듬는 시를 썼습니다.
▴절제된 슬픔: 슬픔이나 고통을 직접적으로 터뜨리기보다, 담담한 어조로 성찰하며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못 위의 잠>처럼 일상의 관찰을 통해 삶의 비애를 포착해내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변화: 최근에는 개인적인 서정성을 넘어 사회적 재난이나 생태적 위기 등 공동체의 고통에 응답하는 목소리를 내며 시적 지평을 넓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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