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빗물 (송이후)
<2026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스님이 처마 끝에 동이를 놓아두었다
장마철 내내 빗물이 고였다
나는 새벽예불 전에 그 물을 든다
무겁다
동이를 기울여 세숫대야에 붓는다
물줄기가 끊어지지 않는다
처마에서 떨어진 빗방울들이
동이 안에서 한 덩어리가 되어 쏟아진다
열흘 전 하늘이던 것이
지금 내 손목을 적신다
나는 그 물로 얼굴을 씻는다
차갑다
이마에 닿는 순간 빗방울의 경계가 사라진다
어느 것이 먼저 떨어진 물인지
어느 것이 나중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세숫대야 바닥에 고인 물이
내 턱에서 떨어진 물방울을 받아들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스님이 마당을 쓸고 지나간다
빗자루 자국이 젖은 흙에 남는다
▶올해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으로 ‘빗물’을 선정했다.
이 시의 단초는 비교적 단순한 일에 있지만,
그 일을 펼쳐놓고 바라보는 마음의 영역은 상당할 정도로 넓다.
스님께서 동이를 놓아두어 처마로부터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아 모으시고,
시적 화자는 그 물을 세숫대야에 쏟아붓고서 세수를 한다.
물에 대한 구별이 없다.
처맛물과 세숫물을 나누지 않고,
동이에 담겨있는 과거의 물과 세수를 하는 지금의 물과
하늘의 비구름이 될 내일의 물을 간별하지도 않는다.
깨끗한 물과 허드렛물의 차이도 없다.
스님의 일과 시적 화자의 일도 갈라놓지 않는다.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장맛비에 ‘젖은 흙’이 ‘빗자루 자국’을 제 몸에 받아들여서
비록 잠시 흔적은 남겠지만
결국 하나의 몸이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융화를 본 것일 텐데,
이런 시안(詩眼)은 앞으로 창작할 불교시에 대한 기대를 크게 갖게 한다.
정진을 거듭해서 불교시의 일신을 이끌어주길 바란다 (심사위원 : 문태준 시인)
▶송이후 시인의 <빗물>은 단순한 일상에서 불교의 핵심 진리인 '무분별(無分別)'과
'연기(緣起)'를 포착해 낸 수작입니다. 심사위원 문태준 시인의 평을 바탕으로 이 시를 짧게 해설해 드립니다.
1. 경계의 소멸과 하나 됨 (융화)
시 속에서 '빗물'은 과거, 현재, 미래의 경계를 허무는 매개체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통섭:
열흘 전 하늘에 있던 빗물이 지금 화자의 손목을 적시고 얼굴을 씻깁니다.
▴구분의 무의미함:
세숫대야에 담긴 물은 어떤 것이 먼저 떨어진 물인지, 나중 물인지 따지지 않습니다.
처맛물과 세숫물,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융화(融和)'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2. '나'와 '세계'의 연결 (연기법)
화자가 세수를 하고 턱에서 떨어진 물방울을
세숫대야의 물이 아무 소리 없이 받아들이는 장면은,
나와 타자(자연)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흔적마저 품어 안는 대지
마지막 연에서 스님이 쓸고 간 마당의 '빗자루 자국'은 젖은 흙에 잠시 흔적을 남기지만,
결국 흙 속으로 스며들어 하나가 됩니다.
이 또한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거대한 하나를 이룬다는
불교적 시선(詩眼)을 아름답게 시각화한 부분입니다.
▴한 줄 요약
이 시는 처마 끝에 모인 빗물로 세수를 하는 평범한 일상을 통해,
세상 모든 것의 경계가 사라지고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깊은 불교적 깨달음을 담백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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